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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생생하게 나타나는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동방번개
생생하게 나타나는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 사진제공: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마음을 되돌렸을 때 하나님이 베푼 긍휼과 관용은 거짓이었느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측면의 성품이 전환되어 나타난 것을 보며 너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분리된 것이 아닌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노하든,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모두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며, 그는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 그가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며 그에게도 마음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알려 준 것이다. 또한 그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 자신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알려 준 것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고,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공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실질적인 견해도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물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은 계속해서 바뀌고, 그와 동시에 다양한 면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난다.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실제적인 나타냄으로 인류에게 그의 진노와 긍휼과 자비 그리고 관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물이 발전함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누가 의심하거나 침범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그 누가 바꾸거나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사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만물의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고, 모든 순간순간에 생생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려 더 이상 진노하지 않고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만 베푸는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진노가 빈말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고 크게 진노할 때, 너는 하나님께 인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며, 그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과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그의 관용과 긍휼에는 모두 흠이 없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순결하며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하나님의 관용은 곧 관용이고, 긍휼은 곧 긍휼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태도로 인해, 사람의 회개로 인해, 하나님은 진노의 성품도 나타내고 긍휼과 관용도 나타낸다.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드러냈든지 그것은 모두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그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사역의 원칙, 마음과 생각 혹은 하나님이 내린 어떤 결정,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결정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이룬다. 이 결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한 것이다. 결과의 근원에 흠이 없고 오점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도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인데,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어떤 연구와 검증(원문: 推敲與體驗)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다른 측면의 본질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또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인류 중에 이러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갖춘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피조물 중에 크게 진노하여 인류를 멸하기로 결정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더냐?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죄를 사해 줌으로 인류를 멸하겠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는 자가 또 누가 있더냐? 창조주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 좌지우지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만이 갖고 있는 성품으로 볼 때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그를 설득하고 그가 내린 결단을 바꿀 수 없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심판받는다. 그가 진노하든, 긍휼을 베풀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본질, 즉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다!

니느웨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전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해석을 통해, 너희는 ‘유일무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의 긍휼을 설명할 수 있느냐?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측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한 것으로, 사람이 거스르거나 그 누구든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모두 갖추고 있지 못한, 하나님만이 특유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인 긍휼도 거룩하고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참된 발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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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 기 :

                       ✔ 말씀 찬양 CCM 2020 <참으로 나타난 창조주의 권세>

                       ✔ 워십 찬양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심> (남성 솔로 찬양)

                       ✔ 워십 찬양 뮤직비디오/MV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시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관한 말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관한 말씀 사진제공 :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하나님의 공의운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증오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지,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든지, 얼마나 많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든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의 존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총애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관용을 베풀지만 한 번도 지나치게 사랑한 적은 없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원칙과 범위가 있다. 너는 아무리 크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어도 절대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피조물과 같은 한 사람이나 친구, 혹은 숭상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감추고 너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니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네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렸든, 네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든, 네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든, 일단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친척이나 친구로 여기거나 하나님을 단짝 대하듯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얼마나 많이 느꼈든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너의 친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패괴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빛이며, 흠이 없이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패괴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절대 원칙 없이, 대상의 구분 없이 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쉽게 노하지 않고, 진노와 위엄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상당한 정도와 기준이 있다. 이는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쏟아 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하는 말이 깊이가 없고 우매하여 어린아이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치지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특히,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욥의 세 친구와 사람들이 욥에게 한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들을 정죄했느냐? 그들에게 노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라 하였고, 그들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는 패괴되고 무지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주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절대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를 총체적으로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서도, 울분이 극에 달해 쏟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자 참된 표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분이어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유와 원칙 없이 노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도 원칙도 없이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패괴된 인류의 전유물이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유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지 못한 패괴된 인류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항상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패괴된 인류는 항상 자신의 지위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쏟아 내고 교만한 본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표하는 것은 모두 죄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여기에는 불순함, 음모와 계략, 패괴와 사악함, 심지어 야심과 욕망이 가득하다. 정의와 사악의 싸움에서 사람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화내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의의 힘이 위협당하고 박해당하고 공격당할 때,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사악한 세력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굽실거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풀이하는 것은 사악한 세력의 출구이며,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의 악행이 넘쳐 나고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때 모든 사악한 세력과 사람을 해하는 죄악은 저지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모든 적대 세력은 드러나고 분리되고 저주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탄의 모든 공범자들은 징벌받고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사역은 막힘없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은 정해진 대로 한 단계씩 앞으로 진행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은 사탄의 교란도 미혹도 받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안정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자생하고 판치지 못하도록 보장하며, 모든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이 존재하고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이 타인의 앞이나 뒤에서 화를 낼 때는 다 서로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미지, 체면 등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화를 내는 데에 기준이 있지만 어떤 이는 기준도 없다. 화를 내고 싶으면 마음대로 내며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화는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온 것이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다 혈기와 천성적인 것에 속하며,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않음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과 본질에는 진리와 부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괴된 인류의 화는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의 행동은 하나같이 다 패괴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고 패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정당하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이 노할 때, 사악한 세력은 저지당하고 사악한 사물은 멸망되지만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사물이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거나 교란시키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롭고 긍정적이며 아름답고 선한 사물의 존재를 수호하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규칙과 법칙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노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우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또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다른 속셈이나 교활함이나 음모가 없고 패괴된 인류에게 공존하는 욕망, 간사함, 악랄함, 폭력성, 사악함 등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의 본질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았고, 이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한 목표와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 두루뭉술하거나 맹목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며, 원칙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또한 하나님 진노의 실제적인 면이다. 인류는 바로 하나님 진노의 이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인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 추락하게 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선한 모든 사물은 멸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피조물의 생존 법칙과 규칙이 파괴되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진노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악한 사람과 사물,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은 징벌받고 통제되고 멸망된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자, 사탄의 공범자 그리고 사탄의 종이 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끊임없이 치고 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로운 일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든 간에,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져 뜻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을 멸할 것이라 선포하기 바로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점차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이 하나의 일에서 동시에 나타났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순되지 않음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완전히 다른 두 본질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본질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 것이다.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는 자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참된 회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리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고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그리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 상을 주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상을 주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은 그 누구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슈퍼맨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나이대인 창조된 인류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다시는 조상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으며, 니느웨 성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사는 니느웨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창조된 인류가 곧 니느웨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언급하기 싫은 니느웨 성의 과거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있는 니느웨 성의 과거와 미래를 증언하는 중차대한 일을 책임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참된 고백에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에게 ‘창조주의 긍휼’이 알맹이 없는 단어나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여기에는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다는 것과 그는 거짓이나 가식이 없고 진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모든 시기와 시대에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창조주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창조주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내용인 것이다. 이 짧은 대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고, 인류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선조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이 오늘날의 후손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긍휼을 베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인류의 어떤 구석, 어떤 시대에 임했더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긍휼로 창조된 인류를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끌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참된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한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처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손수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또한 틀림없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노할 때에도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의 면을 보여 준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사람이 심히 패괴되고 하나님을 매우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리고 그 노는 어느 정도로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노가 사라지게 된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싶든지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고, 더욱이 하나님이 시종 나타내고 있는 주요 2가지 측면이다. 즉,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의 사역 원칙과 목적은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는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께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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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보 기: 

                  
                         ✔ 말씀 찬양 CCM <하나님 성품의 상징>(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위대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성품>



3/21/2020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사람이 성경의 신학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 성경 참고: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8~9)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 관련된 하나님 말씀:

패괴된 사람은 모두 사탄의 올무와 자신의 육, 그리고 사욕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내 마음에 합할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내 마음에 합했다고 자칭하는 자들은 모두 막연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거룩하다 칭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도는 나와 상반된다. 그들의 말에는 교만함과 자만심이 가득 배어 있다. 그들은 본래 나를 적대시하는 자들이고 내 마음에 합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성경에서 나의 종적을 찾으며, 내키는 대로 ‘적합한’ 구절을 찾아 하염없이 읊조리는가 하면, ‘경전’으로 삼아 외우기까지 한다. 그들은 내 마음에 합하는 방법을 모르고, 무엇이 나와 적대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성경’만 읽을 뿐이다. 그들은 본 적도 볼 수도 없는 막연한 하나님을 성경에 국한시키고, 여유가 생길 때면 꺼내어 보곤 한다. 그들은 성경의 범위 안에서 내 존재를 믿고, ‘나’와 ‘성경’을 동일시하며, ‘성경’이 없으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면 ‘성경’도 없다고 여긴다. 그들은 내 존재와 내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은 매우 각별하다. 심지어 적지 않은 이들은 성경의 예언이 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글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성경 구절로 내가 말한 모든 내용을 가늠하고, 심지어 나를 정죄하기까지 한다. 그들이 찾는 것은 성경 글귀에 부합되는 길이지, 내 마음에 합하는 길이나 진리와 하나 되는 길이 아니다.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은 다 나의 사역이 아니라 여기니, 이런 자들은 바리새인의 충실한 자손들이 아니냐?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예수의 마음에 어떻게 합할 것인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율법 구절 하나하나는 진지하게 대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가 구약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과 메시야가 아니라는 죄명을 씌워 죄 없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본질은 대체 무엇이냐? 진리와 하나 되는 길을 찾지 않은 것이 아니냐? 그들은 그저 성경의 글귀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내 뜻과 내 사역의 절차와 방식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글귀를 고집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성경을 지키는 종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이익과 존엄성, 그리고 성경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비로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이유는 단지 성경을 옹호하고, 또 성경의 글귀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앞날을 망칠지라도, 속죄 제물을 얻을 수 없을지라도, 성경의 규정을 따르지 않는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성경 글귀의 앞잡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하냐? 그들은 천국에 가거나 은혜를 받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진리를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 밖으로 내몰려 하였다. 또한 성경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의 도래를 완전히 막으려 하였다. 심지어 성경이 영원히 존재하도록, 두 번째 육신으로 돌아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또다시 못 박으려고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토록 악랄하고, 그 본성이 나를 이토록 적대시하는데 어찌 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사람은 내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나의 빛을 밝게 비추어 주어도 여전히 나의 존재에 대해 무지하다. 나의 진노가 닥칠 때면 나의 존재를 더욱 부인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글귀와 어우러지고 성경과 합하기를 추구하지만, 어느 누구도 내 앞에 와서 진리와 합하는 길을 찾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천상에 있는 나를 앙망하고, 천상의 내 존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육신으로 살아가는 나는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너무도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오직 성경의 글귀와, 막연한 하나님과 합하기만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비천해 보인다. 그들은 죽은 글귀를 숭배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하나님, 사람의 지배를 받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들의 비천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를 적대시하는 자들, 나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자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 나를 거역하는 자들이 어떻게 내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마땅히 그리스도와 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중에서

성경의 글귀에만 신경 쓸 뿐, 진리와 내 발자취를 찾는 일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은 모두 나를 적대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나를 성경에만 국한시키고, 성경 안의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크나큰 모독인데 그들이 어찌 내 앞에 올 수 있겠느냐?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나의 행사와 나의 뜻, 진리가 아니라 글귀이다.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글귀이다. 이런 자들이 어찌 내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마땅히 그리스도와 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중에서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영원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유일한 길이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찾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에 들어설 자격도 없다. 이는 네가 역사(歷史)의 꼭두각시이자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규례와 글귀, 역사의 멍에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영구한 생명의 도를 얻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것은 보좌에서 흘러나온 생명수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고여 있던 더러운 물이기 때문이다. 생명수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시체이고 사탄의 노리개이며 지옥의 자식이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네가 역사(歷史)를 답습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며 현상 유지에 그칠 뿐, 현 상태를 변화시켜 역사를 도태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솟구치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천둥소리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거늘, 네가 죽을 때까지 앉아서 요행만을 바라며 기다린다면 어찌 너를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지키고 있는 하나님을 어찌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누렇게 바랜 지 오래인 네 책의 글귀가 어찌 너를 다른 시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어찌 찾아 줄 수 있겠으며, 또 어찌 너를 하늘나라로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그저 잠시 위안을 주는 글귀에 불과하다. 네가 읽는 성경 구절은 인생을 알려 주는 현묘한 이치도 아니고 너를 온전케 하는 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저 네 혀를 충실하게 해 주는 구절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너는 반성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 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에 대해 알지 못하고 또한 얼마 안 되는 지식과 이치로 성령의 역사를 재단했기 때문이 아니냐? 그들은 체험이 얕으면서도 또 천성이 교만하고 제멋대로라 성령의 사역을 가볍게 여기고 성령의 징계를 등한시한다. 또한 자신의 미약하기 짝이 없는 낡은 이론으로 성령의 사역을 ‘확증’하고, 게다가 스스로 학식이 높다고 믿으며 온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런 자는 모두 성령께 버림받는 자이고 새 시대에 도태되는 자임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 앞에 와서도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모두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경망을 떠는 소인배들이 아니냐? 얼마 되지도 않는 성경 지식으로 온 세상의 ‘학술계’를 주름잡으려 하고, 겨우 사람이나 가르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이론만으로 성령의 사역을 자기의 생각에 맞춰 움직이게 하려는 야심 찬 생각을 하며, 좁은 안목으로 하나님의 6천년 사역의 풍모를 한눈에 다 꿰뚫으려고 한다. 그런 자에게 무슨 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중에서

어째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데에 힘을 적잖게 들였는데도 인식만 있을 뿐 실제적인 길을 말하지 못하겠느냐? 너는 인식이 있으면 진리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어리석은 견해가 아니냐? 네가 백사장의 모래만큼 많은 인식을 말할 수 있다 한들, 그 안에 실제적인 길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허세가 아니겠느냐? 전부 남을 해하는 수작에 불과하다! 이론이 고매할수록 실제가 없기에 사람을 실제 속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이론이 고매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거역하고 대적하게 된다. 고매한 이론을 보배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화근일 뿐,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어떤 이가 최고의 이론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는 실제가 조금도 없을 수도 있다. 그 자신이 아직 체험하지 못했기에 실행의 길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 뿐, 정상 궤도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사람을 해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너는 적어도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해 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진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네가 봉헌한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일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비현실적인 큰소리만 치면서 합당하지 못한 수작으로 다른 이를 속박하여 네게 복종시키려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점점 더 흐리멍덩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다 보면 수많은 규례가 생겨 사람들이 너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부 사람의 부족한 면인데, 실로 골치 아픈 문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제를 좀 더 중시하여라> 중에서

너희의 인식은 다른 사람에게 짧은 시간 동안 공급할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똑같은 것만 말하면 그것을 알아보고 네가 너무 얄팍하여 깊이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럼 너는 어쩔 수 없이 도리를 말해 사람들을 미혹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아래 있는 사람들도 네 방식과 절차, 형식에 맞춰 하나님을 믿고 체험하면서 그러한 글귀와 도리들을 행하게 된다. 네가 그렇게 거듭 설교하면 결국 사람들은 모두 너를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네가 사람들을 이끌며 도리를 가르치면, 아래 있는 사람들도 따라서 도리를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면 길을 잘못 들어 정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네가 가는 길이 곧 아래 있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니, 그들은 너를 보고 배우고 너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 너는 속으로 ‘이제 내게 권력이 생겼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내 말을 듣다니, 뭐든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배반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배척하고 스스로 어떤 종파나 파벌을 형성하게 한다. 각 종파나 파벌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각 종파의 지도자들을 보면 전부 오만하고 독선적이어서 성경을 제멋대로 끊어 해석하고, 자신의 상상에 따라 설명하며, 은사와 지식으로 사역한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따르겠느냐? 어쨌든 그들에게는 지식이 좀 있기에 도리를 가르치거나 사람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고, 이러저러한 수법을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오고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를 따르고 있다. 참도를 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일은 리더에게 물어봐야 합니다.”라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다른 이를 통해야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럼 그들의 리더는 어떤 존재가 되었느냐? 바리새인, 거짓 목자,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참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느냐?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에서

💁 추천 동영상 : 기독교 영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인가!>명장면(3)성경 말씀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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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2020

[전능하신하나님교회]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에 관련된 진리 - 교계가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거부한 결과와 결말

교계가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거부한 결과와 결말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 관련된 하나님 말씀: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영원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유일한 길이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찾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에 들어설 자격도 없다. 이는 네가 역사(歷史)의 꼭두각시이자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규례와 글귀, 역사의 멍에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영구한 생명의 도를 얻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것은 보좌에서 흘러나온 생명수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고여 있던 더러운 물이기 때문이다. 생명수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시체이고 사탄의 노리개이며 지옥의 자식이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네가 역사(歷史)를 답습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며 현상 유지에 그칠 뿐, 현 상태를 변화시켜 역사를 도태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솟구치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천둥소리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거늘, 네가 죽을 때까지 앉아서 요행만을 바라며 기다린다면 어찌 너를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지키고 있는 하나님을 어찌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누렇게 바랜 지 오래인 네 책의 글귀가 어찌 너를 다른 시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어찌 찾아 줄 수 있겠으며, 또 어찌 너를 하늘나라로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그저 잠시 위안을 주는 글귀에 불과하다. 네가 읽는 성경 구절은 인생을 알려 주는 현묘한 이치도 아니고 너를 온전케 하는 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저 네 혀를 충실하게 해 주는 구절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너는 반성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 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너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오지 않으면 너 스스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느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느냐? 그렇다면 너에게 권하노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라. 너는 현재 사역을 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사람을 구원하는 말세 사역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도 생명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가 가져다준 생명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허황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혐오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도에 순종해야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공급을 거부한 채 복받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말세에 그리스도가 온 이유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역은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사역이며, 새 시대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네가 인정하지 않고 정죄하거나 모독하거나 핍박을 가한다면, 반드시 영원히 불태워질 것이며,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이 그리스도는 성령의 발현이자 하나님의 발현이며,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가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성령을 모독한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명심해라. 네가 말세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저버린다면 아무도 너 대신 그 대가를 치러 주지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고, 나아가 만회하고자 해도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대적하고 저버린 이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느냐? 너는 작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권하노니, 진리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말고, 사실을 외면한 채 함부로 말하지도 말라. 너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너를 소생시켜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두 번째 성육신을 언짢게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심판 사역을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은 흔히 사람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고 사람의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말해 둔다. 사람은 땅에 있는 구더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한 지고지상한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머리는 썩은 물웅덩이 같아서 구더기만 나올 뿐이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지휘하는 각 단계의 사역은 하나님 지혜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는데, 그러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이 어느 쪽일지는 뻔한 사실이다. 각자 자신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말기를 권한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너는 왜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너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대단하냐? 다른 사람은 진리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 있는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대세의 흐름이다. 하나님은 너의 ‘공로’ 때문에 심판 사역을 두 번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너는 크게 후회할 것이다. 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하늘의 크고 흰 보좌가 너를 ‘심판’하기를 기다려라! 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저버리고 부인했지만 예수가 인류를 속량한 일은 우주 땅끝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이룬 사실이 아니냐? 네가 아직도 예수가 너를 맞이해 하늘나라로 데려가기를 기다린다면, 나는 너를 고집불통에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하겠다. 예수는 진리에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으면서 복만 받으려고 하는 너 같은 거짓 신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가차 없이 불 못에 던져 만년 동안 불태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 중에서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이 징벌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트집을 잡고 막무가내로 우기고 흠을 찾거나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면 결국에 손해를 보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누군가에게 떠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목표, 선택 과정이 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징벌뿐일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의로 대한다. 네 나이가 얼마나 많고 경험이 얼마나 풍부하든, 나아가 지난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절대 그것들로 인해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과대평가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네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과 그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이대접만 받으려 하고 연장자 티를 내며 하나님께 조건을 들이민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너를 떠나가게 된다. 그럼 너는 유대인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메시야만 을 기다리다가 결국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를 산 바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

바리새인들의 지식과 외적인 행위는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을 망쳤다. 그들은 지식과 관념, 그리고 마음속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예수를 정죄했으며, 상상과 생각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영안(靈眼)이 가려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세상에 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갖은 노력을 다해 증거와 빌미를 찾아 예수를 정죄했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하나님 사역을 지킨다는 것을 핑계로 오늘날 전개되는 하나님의 현실적 사역을 정죄하는 그들의 추악한 면모이다. 물론, 이는 또한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들은 낡은 도리와 규례로 자신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진리를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참도를 수호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절을 지켰다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하냐?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역을 펼치고, 그의 경영을 행한다. 언제나 새롭다는 말이다. 반면, 사람은 어떠하냐? 언제나 얼마 안 되는 낡고 케케묵은 것들을 지키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선포라고 착각하며 득의양양해하고 우쭐거린다. 또한, 하나님이 영원히 자신을 버릴 리 없고, 푸대접할 리 없다는 태도로 상을 베풀기만을 기다린다. 그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새 시대의 사람들이 더 많이 그를 따르고 그의 새 사역을 받아들일 때, 상을 받기만을 기다리는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 도태될 것이며,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떨어질 것이다. 그들이 징벌을 받는 그 순간,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삶은 그렇게 끝나고, 그들의 결말과 종착지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우리 눈앞에서 알게 모르게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무정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사람이 제대로 추구하지 못한 것이겠느냐? 이것은 사람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 아니겠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징벌받은 대표적인 사례ㆍ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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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2020

[전능하신하나님교회] 말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외식하는 것이란?

                                                  외식하는 바리새인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 관련된 하나님 말씀:

바리새인’이라는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외식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모든 일에 가식적이어서 언제나 훌륭한 사람인 양,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인 양 위장한다. 그들의 본모습이 정말로 그러하겠느냐? 가식이라고 하면 모든 태도와 모습이 진실하지 않은 거짓되고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진실한 면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둔 채 드러내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종교적 지식과 이론들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입에 달고 다니는 글귀상의 도리가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렇듯 ‘올바른 것 같은’ 도리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포장한다. 그래서 그들이 설교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모두 올바르고 훌륭해 보이며, 사람의 관념과 입맛에 맞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경건하고 겸손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포용할 줄 알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껍데기를 들춰 보면 전부 거짓과 위장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듯하지만 뒤에서는 건성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고생을 마다치 않으며 헌신하는 것 같지만 뒤로는 교회 밥을 먹고 제물을 훔쳐 먹는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과 행동은 전부 거짓이다. 그런 자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바리새인’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이방인 가운데서 생겨났겠느냐? 그렇지 않다. 전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겨났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겠느냐? 설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느냐? 그들이 그렇게 변해 버린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를 무장하는 도구로 삼고, 그것을 밑천으로 밥벌이를 하며 밥을 얻어 먹었다. 그들은 종교적 도리를 전했을 뿐, 단 한번도 하나님의 도를 행한 적이 없다. 그들의 그 소위 ‘올바른’ 행동과 태도, 버림과 헌신 등은 다 사람의 의지로 억누르고 꾸며낸 것으로, 전부 거짓이며 위장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티끌만큼도 없다. 아니, 경외심은커녕 참된 믿음조차 없다. 게다가 그들은 불신파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길에 들어서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이것이 두렵지 않으냐?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지표>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 좋은 행동을 하는 것, 어떻게든 영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 영적인 사람으로 행세하고 말과 행동으로 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사람의 관념과 생각에 맞는 것 같은 일을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적인 척 보이려고 하는 것이며, 외식하는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글귀나 도리를 말하는 한편, 남에게는 선을 행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진리 추구를 중시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을 처리하거나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진리를 찾지도, 진리의 원칙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또한, 진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고, 일이 닥치면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이 같은 외적 행동과 내적 상태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믿어도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없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되겠느냐? 늘 무엇으로 자신을 채우겠느냐? 글귀나 도리로 자신을 채우지 않겠느냐? 늘 글귀나 도리로 자신을 무장하고 포장하며, 바리새인이나 이른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행하는 것은 어떤 행실이냐?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종교 의식을 행하면서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만 구원받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중에서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는 이들은 형제자매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얘기하지만, 뒤에서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 다른 꿍꿍이를 부린다. 이들이 종교 바리새인과 다를 바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들은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기꺼이 진리를 실천하며, 양심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모든 일을 지혜로이 해결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원칙 있게 일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말로만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얘기하면서 온종일 울상을 짓고, 능청스럽게 불쌍한 척 연기를 하니 정말 못 봐줄 노릇이다! “왜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 마디도 못 하면서 말이다. 네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겉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줘야 하며,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무성의하게 말로만 하나님을 대하는 자들은 모두 위선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며, 성령의 감동이 없음에도 울음을 터뜨리려 한다. 이들은 종교 의식과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그것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이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이나 슬픔의 눈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그릇된 자들이 발전성이 있겠느냐? 어떤 자는 겸손해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얌전한 척 말한다. 또 어떤 자는 순한 양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춰 아무 힘도 없는 양 행동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정말 그렇단 말이냐?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활발하고 자유로우며, 순수하게 마음을 열어 놓는다. 또한, 정직하고 사랑스러우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인격과 존엄성을 갖추어 어디서든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 수 있기에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새 신자들은 형식적인 것이 너무 많아 한동안 훈계와 깨뜨림을 받아야 한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겉으로는 티 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는 사람이다. 네가 매일 여기저기 복음만 전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데에만 급급해하면서 정작 자신은 규례와 도리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종교 인사에 속하며 외식하는 사람이다.

종교인들은 함께 모이면 “자매님, 요즘 어떠세요?”라고 묻곤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저도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따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몇 마디, 몇 자의 말로 마음속 깊이 자리 잡힌 더러운 것을 뱉어 내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장 혐오스럽고 극도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들의 본성은 모두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실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마음을 열고 교제한다. 거기엔 솔직함만 있을 뿐 거짓도, 체면치레도, 꾸밈도 없고 세속적인 규율도 없다. 하지만 겉면의 열정이 많고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은 누가 찬송가를 부르면 춤추느라 밥솥의 밥이 다 타 버린 것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경건함과 존귀함이 없고 너무나 경박하다. 이런 것들이 모두 실제가 없음을 보여 준다. 반대로 영적인 생명의 일을 교제할 때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지 않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가 죄스러워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얘기를 입에 달고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표면적인 열의나 행동이 아닌, 실제에 진입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외적인 좋은 행위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육을 의미한다. 외적인 행위는 제아무리 훌륭해도 그 사람의 성품만을 의미할 뿐, 생명을 의미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도 없다. 네가 하나님께 죄스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다른 사람의 생명에 공급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영적인 것이라 여기겠지만, 사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너는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의 기호가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성격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네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요, 너의 습관은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것들이다. 하나님께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거든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지 않고 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겉으로만 행동을 취하는 것은 네가 누구보다 가식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인 좋은 행위만 있을 뿐 실제가 없는 자들이 어떤 사람이냐?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요, 종교 인사이다! 외적인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다면, 가식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가식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대적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종교 의식이 아닌 실제를 중요시해야 한다> 중에서

정상적인 영 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현재 하나님이 하려는 일에 대해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고, 옛것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든 실행이 생명 성장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기도는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거나 하나님 앞에서 한번 대성통곡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운용하는 훈련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여 범사에 말씀의 인도를 구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마음이 날마다 새로운 빛에 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소극적으로 되지도, 게을러지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위한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다 행위만 중요시할 뿐, 생명의 성장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치우친 것이다. 새로운 빛은 받아들이지만 실행법을 바꾸지 않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의 하나님 말씀을 과거의 종교 관념과 결합해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 관념을 띤 도리이지, 순전한 오늘날의 빛이 아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실행에는 불순물이 끼어 있으며, 형식만 바꿨을 뿐 내용은 그대로이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게 행해도 그것은 외식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매일 사람을 인도하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낡아 빠지고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닌, 날마다 새로운 견해와 인식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네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겉으로만 열정적이고 바쁠 뿐, 행실이 조금도 바뀌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정상적인 영 생활에 관하여>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실제 하나님과 하늘의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목적이 있어야 사람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조금 생기게 된다면 이런 순종은 조건부 순종이자, 개인의 앞날을 전제로 한 순종이며,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대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느냐? 네가 그저 장래와 운명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다. 너의 그런 ‘믿음’은 자기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고, 자기 위안이며 자아도취다. 너의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지를 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네 본심이 정말 이러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높이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이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고,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만약 네 본심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네가 말하고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 심지어 너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너의 말투가 부드럽고, 태도가 온화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너의 일거수일투족과 표정이 적절해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너의 본심과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서 본다면 네가 한 모든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양과 같이 순종하면서 마음속에는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이며, 직접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는다. 성령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이들을 한 명씩 드러낼 것이다. 외식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께 버림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처벌하고 해결할 것이니 모두 조급해하지 말라.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중에서

💁 참고 설교:

『목회자가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가 아닌지 알아보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그들의 표면적인 태도가 아닌, 주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신자들을 꽤나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에게는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주님과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미움과 증오로 점철되어 있고, 말세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적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언뜻 보기에 그들은 사역하느라 몹시 고생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면류관과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주님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외식하는 사람을 가려내려면 먼저 그 사람의 마음속, 곧 마음가짐을 봐야 합니다. 이런 판단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는지 알아보려면 가장 먼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준행하는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지를 봐야 하며, 나아가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하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지 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배할 때 늘 성경을 가르칩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 성경의 규례를 지킬뿐더러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 23:5)라고 그들을 폭로하셨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한참 동안 기도합니다. 금식을 할 때는 짐짓 얼굴을 흉하게 해서 모두에게 자신이 금식 중이라는 것을 알리지요. 이 밖에도 그들은 남들에게 보여 주려고 거리에서 구제를 행하고 의를 행하며, ‘손을 깨끗이 씻지 않고 밥을 먹어선 안 된다’와 같은 옛사람들의 종교 의식까지 대대로 지켰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옹호와 존경을 받기 위해 사소한 일들을 크게 부풀려 스스로를 포장합니다. 또한, 사람들을 이끌어 종교적인 예배와 찬송, 찬미를 하거나 조상의 유전을 고집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진리의 실제에 들어가는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겉면의 행위로 신자들을 미혹하고 속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 경건한 척하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성경을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등을 돌렸습니다. 또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거짓 증거를 날조하며, 미친 듯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모함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막았으며, 결국에는 집권자들과 결탁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외식하고 진리를 증오하는 바리새인들의 민낯이 낱낱이 폭로되었고, 적그리스도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바리새인의 본질은 외식하고, 음험하고, 간사하고, 악독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에 등을 돌린 채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하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미혹하고 억압했으며, 교계를 통제해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은 물론, 광기 어린 사람들처럼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정죄하고 증오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적그리스도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갖가지 양상을 확인했습니다. 그 모습들을 오늘날 교계 목회자들에게 대입해 보면,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며, 주님을 받들거나 증거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성경을 믿고 숭배하며 높이 떠받드는 사람들에 불과하지요. 그들은 때에 맞춰 예배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떡을 떼고, 성찬을 하는 등 갖가지 종교 의식들을 지킬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겸손과 인내, 경건과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더더욱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들의 사역과 설교는 오직 성경 지식과 신학 이론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에만 치중할 뿐,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하고 체험해야 하는지, 주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널리 알리고 증거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 등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에 대해서는 찾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도 않고, 나아가 사람들을 말씀대로 실천하고 준행하는 길로 이끌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성경 지식과 신학 이론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자랑하고 치켜세워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얻기 위해서지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진리를 선포하고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시자, 목회자들은 교계에서 신자들을 영원히 장악하고 통제해 독립 왕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공공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판단하고 공격하고 모독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참도를 찾는 신자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신랑이로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서 맞으라고 일러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온 힘을 다해 교회를 봉쇄하고 신자들을 가로막아 참도를 찾거나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하는 형제자매들을 비방하고 욕하고 폭행하라고 신자들을 부추겼습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말과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목회자들은 각종 유언비어를 지어내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비방했으며, 심지어 마귀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대적하고 정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모함했습니다…. 이를 통해 교계 목회자들의 모든 언행은 주님의 가르침에 완전히 위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소경된 인도자이자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에 관한 대표적인 문답(선집)≫ 중에서


3/13/2020

[전능하신하나님교회] 말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란?

기도하는 베드로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는 것이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네가 교제하는 내용도, 진입하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있는 사람이므로 절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오는 사람을 원한다. 과거에 네가 깨달은 것들이 아무리 순수하고 좋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앞으로 너의 진입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다. 성령의 현재 빛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복 있는 사람이다. 만세와 만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랐지만, 오늘날까지 따라오지는 못했다. 그러니 이는 말세 사람들의 복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최신 사역을 알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중에서

성령의 사역은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갈수록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내일의 깨우침은 오늘보다 더 높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듯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면 언제라도 도태될 것이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낡은 시대는 지나가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다. 새 시대에는 새 사역을 한다. 특히 사람을 온전케 하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은 더 새로운 사역을 더 빠르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규례를 지키지 않으며 어느 단계의 사역도 영원불변한 사역으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더 새롭고 더 높은 사역을 한다. 그의 사역은 갈수록 더 실제적이고, 사역을 할수록 점점 더 사람의 실제적인 요구에 부합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사역을 체험해야만 최종적인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다. … 하나님의 사역은 시대마다 다르다. 네가 이 기간의 사역에 잘 순종했더라도 다음 기간의 사역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거나 순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이 단계로 올 때 네가 따라왔다면 다음 단계로 갈 때에도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시종일관 변함없이 순종해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만 순종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순종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새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네가 따라오지 못하고 과거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너의 생명이 성장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을 통해 너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네가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면 성령은 반드시 너에게 사역할 것이다. 성령은 내가 말하는 대로 역사하므로 너희가 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성령은 바로 너희에게 역사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너에게 이상이 없다면 네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겠느냐? 오늘날의 사역에서 너는 이상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로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믿는 이는 누구냐? 너는 어째서 그를 믿느냐? 너는 어째서 그를 따르느냐? 그저 장난으로 믿는 것이냐? 스스로 네 목숨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이냐? 오늘날의 하나님이 바로 가장 큰 이상인데, 너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 얼마나 깨달았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탄탄한 토대가 생겼느냐?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이 흐려진 것을 기회로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쉽겠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대해 네 관념을 얼마나 내려놓았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한 이상을 갖추었느냐?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너는 항상 따르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며, 아무도 너를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그렇게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그를 알아야 하고 그의 사역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받고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에게 온전케 되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너에게 필요한 이상이다. 항상 은혜를 누리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누리게 하고 은혜를 베풀기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목숨을 버리고 따를 수 없다면,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없다면, 결단코 끝까지 따를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흐리멍덩하게 따르지 말고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중에서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예수를 따르면서 그에게서 사람에게 없는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일 년을 따르자 예수는 베드로를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뽑았다(물론, 이것은 단지 예수의 마음속 일이니 사람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음). 생활 속에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베드로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베드로는 특히 예수가 전하는 도를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베드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해 주었고, 그에게 매우 충성했으며, 그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곳곳을 다니는 예수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온유한 말씀, 그리고 먹고 입고 자고 행하는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고, 다방면으로 예수를 본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것이 옳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지난날 자신의 모든 낡은 것들을 벗어던지고 예수의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본받았다. 그때에야 베드로는 천지 만물이 모두 전능자의 수중에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선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어떠함을 받아들여 본보기로 삼았다. 베드로는 삶 속에서 예수가 자신이 한 것만이 옳다고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자랑한 적도 없으며, 도리어 사랑으로 사람을 감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일에서 예수의 어떠함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모든 것은 베드로가 본받을 대상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의 비밀에 대한 해석ㆍ베드로의 인생에 관하여> 중에서

베드로는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통회했으며, 그 후에 적합한 길을 찾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 그는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자신의 옛 성품에 대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진리에 깊이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형벌,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연단, 환난, 궁핍한 생활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냐? 형벌이든 심판이든 환난이든 너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자, 사랑 안에 있는 순결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 참고 설교: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란 하나님의 현재의 사역을 좇으며, 하나님의 최신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역사와 인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궁극적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겉으로만 성경 말씀을 따르고 성경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말과 가르침대로 실행하고 체험할 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거나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으며 그저 종교 의식과 규례를 지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고 실행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은 힘을 잃게 하고 등한시하며 예수님의 계명 또한 전혀 지키지 않는다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께 미움받아 내쳐지고 저주받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서 영적 위인이나 목사, 장로들을 맹신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추앙합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기든 다 목회자에게 의견을 구하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참도를 알아보는 일조차 목회자에게 물어보지요. 그 결과,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나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 미혹되고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따른 결과이자 결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오직 성령의 역사와 현재의 하나님 말씀, 성령 역사의 발걸음을 따르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말세 심판 사역을 하실 때, 종교계가 성령 역사를 잃고 황무지로 변해 어쩔 수 없이 참도를 찾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역사를 찾는 데 더 힘써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말씀과 역사를 찾지 않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하나님의 최신 말씀으로 공급을 받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세 사역에서 도태되고 버림받을 것이며, 어둠 속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늘 종교계의 목회자를 추앙하는 사람은 모두 사람에게 순종하고 사람을 따르는 자이니, 결국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 드러나고 도태되고 버림받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라고 외치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은혜시대에 유대교 신도들과 베드로, 요한 등이 예수님을 대할 때 보인 각기 다른 태도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고 진리를 선포하셨으며, 회개의 도를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대부분 신도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의 가르침만 따랐을 뿐,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구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간판만 내세웠을 뿐, 실제는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요한, 마태, 빌립 등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보았고, 그의 말씀은 다 진리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곧장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말세에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계시록의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에 관한 대표적인 문답(선집)≫ 중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을 따른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진리에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생명 체험의 길을 찾는 한편,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문제가 놓인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구하고, 사람이 말하는 이치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심을 높여 사람의 통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전부 순종하고 따르겠지만,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거부하겠다. 리더와 일꾼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안배에 반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람의 생각을 밀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배치와 뜻에 부합한다면 따르겠다.’라고 생각하며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상부의 교제 중에서



2/05/2020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진실한 기도란?

기도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  관련된 하나님 말씀 🍄🍄🍄

진실한 기도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와 교제하면 그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바로 네 앞에 있는 것 같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며, 마음이 환해지고 그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져 특별히 격려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그 기도를 듣는 형제자매들도 기쁨을 누린다. 네가 그들의 속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다. 진실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생겨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너의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는 증거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드리고 진심을 말한다면, 하나님도 사람에게 역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원한다. 사람이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그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부족함과 패역한 성품을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야 하나님도 너의 기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외면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때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명확한 언어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 달라고, 인도하고 지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임했을 때 진심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라는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은 바로 알지 않겠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사람의 마음은 진실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이렇듯 진실하게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느냐? 때로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진심이 움직였다면 하나님은 응답한다. 어려움이 닥쳐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다고 느낄 때, 무력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께 건다. 그럴 때 사람의 기도는 어떠하겠느냐? 그럴 때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하겠느냐? 참되지 않겠느냐? 거기에 불순물이 있겠느냐? 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도와 달라고 간청할 때 비로소 네 마음에 진정성이 생긴다.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네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이다. 네가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 네 기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네 어려움을 보고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며 도와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을 때는 먼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 중에서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를 한 번 하고 나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요구에 부응하길 원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인식이 더해져 하나님이 밝혀 준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기도를 하고 나면 의지와 믿음이 생기고, 인식과 실천의 길이 생긴다. 그래야 진실한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야말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나는 형제자매들이 날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규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잠을 조금 적게 자고, 조금 적게 누리더라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한 뒤 하나님 말씀을 누리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네가 매일 아침 이렇게 실천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왕래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저희에게서 증거를 누리실 수 있도록,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저를 온전히 바치길 원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흡족게 하며 당신을 제가 추구하는 목표로 삼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십시오.” 네가 이런 부담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받드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네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이 가장 진실한 기도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 참고 설교 🍄🍄🍄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하면 다음의 몇 가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패괴된 실제 모습, 본성과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즉, 스스로를 알아 갈 수 있지요.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생명 진입이 있다는 증거지만, 만약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므로 과오에 속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나중에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에 실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오랜 세월 기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한 것에 해당할까요?”라며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앞서 말한 몇 가지로 가늠하시면 됩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됐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진리를 구하게 됐는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됐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됐는지 등을 살펴보시면 됩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전혀 없다면, 그 기도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에 속하지 않습니다.』

―<설교집(5)ㆍ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목적과 의의> 중에서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심판이란?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한다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 관련된 하나님 말씀:

심판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라 당연히 하나님이 친히 해야 한다. 이 사역은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심판은 진리로 인류를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은 성육신의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이 사역을 한다. 말하자면, 말세의 그리스도는 진리로 만방의 사람을 가르치고, 모든 진리를 만방의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사역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 중에서

‘심판’이라는 말을 언급하면, 너는 여호와가 만방에 알린 말씀이 떠오르고,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꾸짖은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씀들이 엄하긴 해도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의 서로 다른 상황, 즉 서로 다른 배경에서 하나님이 한 말씀일 뿐이다. 그런 말씀들은 말세의 그리스도가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다. 말세의 그리스도는 다방면의 진리로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의 본질을 폭로하며 사람의 언행을 분석한다. 그런 말씀에는 다방면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본분,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 사람이 어떻게 정상 인성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 등등이 있다. 이런 말씀은 다 사람의 본질과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이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렸는지를 폭로하는 말씀들은 더더욱 사람이 원래 사탄의 화신이고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라는 것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심판 사역은 두세 마디 말로 사람의 본성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폭로하고 책망하며 훈계하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식의 폭로와 책망 그리고 훈계는 일반적인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전혀 없는 진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어야 심판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심판이어야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으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탄복하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할 수 있다. 심판 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되고 패역의 진상에 대해 알게 된다. 심판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사역의 근본 취지에 관해 많이 알게 되고, 사람이 알 수 없었던 비밀을 많이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패괴된 본질과 근원을 알게 되고, 사람의 추악한 몰골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사역의 성과는 심판 사역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사실 심판 사역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길과 생명을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는 심판 사역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 중에서

🔍 참고 설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모든 긍정적인 사물은 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 사탄의 방해나 패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이 존재하는 곳에는 꼭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임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곳에는 진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있어야 심판과 형벌이 있고, 심판과 형벌이 있어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 역사의 발자취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현현을 찾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심판의 권병이 있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패괴된 인류를 심판하실 권력이 있습니다. 이는 인자, 즉 그리스도가 바로 ‘심판의 주’임을 설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없으면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하며,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게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패괴된 인류에게 진리는 곧 심판이자 감찰, 형벌이며,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 진노가 나타납니다.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는 오롯이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전능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시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많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앎도 많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점차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살아 내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면 빛과 사랑 가운데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가 진리를 선포해 심판을 시행함으로써 이루신 성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진리이며, 다 인류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심판의 효과가 있습니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패괴된 인류에게 심판이었습니다. 은혜시대, 예수님의 말씀 역시 패괴된 인류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시대, 전능하신 하나님이 심판 형벌의 사역에서 하시는 말씀도 다 인류에게는 심판입니다. 이를 통해 인류는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그분의 최고의 사랑이며, 그분의 심판과 형벌이 가져다준 것은 전부 구원과 온전케 함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과 완벽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침륜과 멸망에 빠질 것입니다….』

―상부의 교제 중에서